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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12 12:35
[시애틀 수필] 13년 후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135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13년 후

 
곧 돌아올 듯 맡겨놓은 짐들이다. 장롱 속의 옷은 고국을 떠나던 그날, 내가 걸어놓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현듯 문을 열어 젖히자 녀석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주인 없는 빈방에서도 녀석들이 기죽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어쩜 그건 주인을 기다리는 믿음, 한번 신하이면 죽어서도 영원하다는 듯, 이천 여 년을 이어온 진시황릉의 토병들을 닮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오늘까지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게 어찌 녀석들만의 오기뿐일까. 이제나 저제나 딸의 환국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의 손끝임에랴. 때때로 장롱 문을 열어 거풍시키고 벌레라도 슬까 좀약을 챙기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친정 곳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던 묵은 짐들을 들어냈다. 색 바랜 포장지가 삭아서 손이 닿기도 전에 푸석푸석 내려앉는다

살아남기 위한 위장술이었던 듯 아니면 역할분담이었던 듯 포장지와는 달리 그릇들이 빼곡히 얼굴을 내민다. 세수하지 않은 민낯이 눈곱도 떼지 않고 투정하는 어린애 같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에 대한 대가에 보답하는 내 처세가 참 어처구니없다. 새삼스레 미국으로 가져가기엔 이미 제몫을 잃었다. 내 집엔 미국제품들이 저들 대신 들앉아 있는 까닭이다.

내가 비록 저들을 지독히 사랑한 때문이었다 한들 쓸모의 유무를 따지는 행동이라면 그건 배신이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신파에 마음이 동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말의 유희라는 걸 알고 나자 역겨움이 더했다. 오늘의 내가 그렇다. 나는 저들을 방치한 갑질이다.

13년 동안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옷을 낚아채가는 막내 동생도 어느 새 중년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삶의 연륜이 밴 말이다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옮겨간 짐 속에 섞이지 않았다면 동생 말이 영 틀린 게 아니다. 이민의 삶이 어찌 녹록했을까마는 실은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기에 말려서 툭툭 털어 입는 이 나라의 실용문화에 빠져서 장롱 속에 있는 것조차 잊고 살았던 게 사실이다

어쩜 삶이란 세탁기에 씻고 건조기에 말려도 끄떡하지 않는 면직물 같은 게 아닐까. 우아한 척, 가진 척 하다가 세상 한 모퉁이로 내몰리는 왕따의 삶보다 세탁기의 기세나 건조기의 열풍도 견뎌내는 강인한 생명력 말이다

13년의 세월을 어디다 비겨볼까.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중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그러고도 3년을 더 보낸 세월이다. 그 삼년의 말미에 나는 결혼을 했지. 13년이란 자유분방했던 내 미혼생활의 절반 세월이다. 그 후 나는 두 번의 13년을 더 보냈고, 또 한 번의 13년을 이어가는 끄트머리에 거진 와 있다

그리고 그 한 기간을 이민자로서 살았다. 서양에서는 숫자상 불운의 숫자로, 한국에서는 붉은 악마로서의 13번째 선수 외는 별다른 의미 없는 숫자인데 친정의 이사가 또 한 차례 13년의 획을 그으면서 나는 왜 때아니게 삶의 회한에 젖어 들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삶에도 단층이 있다. 불현듯 만나는 삶의 충격들이라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인연들이다. 그것을 미처 감지하지 못한 건 내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불경에서는 어리석은 것도 죄라고 하던가.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면하고 싶은 내 욕심이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강도 5.8의 지진이 일어난 것을 보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에서 어찌 나만 빗겨갈 수 있을까 싶다. 지층 속에서 들끓고 있는 용암이 어느 한 순간 불기둥을 뿜어내듯, 호시탐탐 허점만 노리는 감정 또한 때를 놓칠세라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혼이니 별거니 살인조차 무감각하게 보고 듣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이민이라는 것도 새로운 단층을 이어가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랴

이제 내게 남은 삶의 단층은 어떤 것일까. 그런데 젊음의 열정이 사그라진 때문인지 이젠 어느 것인들 다름없을 성 싶다. 바람이라면 여태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을 믿고 싶을 뿐이다.  

가격표 때문에 바깥바람도 제대로 쐬지 못한 녀석들이 순식간에 폼을 구기면서 바닥에 나뒹군다. 아꼈다가 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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