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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8-08 14:41
[시애틀 수필- 이 에스더] 토끼의 간을 씻다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059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토끼의 간을 씻다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가 시원하다.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있던 더위가 찬물에 손을 씻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가시는 듯하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산바람을 벗하며 잠시 세상사를 잊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생각뿐이다.

오늘은 손빨래가 제격이겠다. 행주나 걸레 정도 빠는 것을 손빨래라고 하기에는 양이 차지 않을 성 싶다. 와이셔츠와 얇은 여름 옷가지들을 바구니에 담아 뒷마당으로 나갔다. 커다란 고무 대야를 가져다 놓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찰랑찰랑 채워지는 물 만큼씩 더위가 밀려나는 것 같다. 손빨래가 피서의 방편이라니 구차한 느낌도 들지만 살뜰한 주부의 모습이 기특하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물이 찬 대야에 물비누를 넣고 휘휘 저었다. 좁은 용기 안에 갇혀 있던 비눗방울들이 제 세상 만난 듯 마음껏 몸집을 부풀린다. 무지갯빛 동그라미들이 대야에 가득하다. 빨랫감을 담그고 셔츠의 깃과 소매에 비누를 묻혀 빨래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네모난 빨래비누의 향이 신선하다.

한때 손빨래를 고집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 키우기도 바쁜데 손빨래를 하느라고 낑낑대던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고생을 사서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했다.

한옥에서 살던 시절, 여름이면 남편은 등목을 즐겼다. 내게 건네주던 그의 속옷은 언제나 땀에 젖어 있었다. 축축했던 속옷은 가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가장의 고단한 흔적이었다. 등줄기에 흐르던 땀을 묵묵히 받아준 내의가 고마웠고, 그의 땀이 소중했다.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옷을 기계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지아비의 등을 쓰다듬는 지어미의 마음이었다.

첫 아이가 태어난 후, 목욕시킨 아기를 재워놓고 부드러운 배냇저고리와 기저귀를 빠는 순간이 더없이 좋았다. 인형 옷처럼 작고 여린 아기의 옷을 차마 기계 속에 넣을 수가 없었다

조그만 목욕통에 담긴 저고리에도 팔딱팔딱 뛰는 아기의 심장소리가 배어 있었다. 빨래를 널며 올려다 본 하늘은 아름다웠다. 빨랫줄에서 보송보송 마르던 기저귀에는 아기의 내일이 그려지고 내 얼굴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정성스럽게 빤 하얀 셔츠가 대야 안에서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다.

빨래를 행길 때는 맬강물이 잘잘 나올 때까지 깨까시 행가서 뽈깡 짜야 쓴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와이셔츠는 뽈깡 짜면 안되는디요.” 하늘을 올려보며 대꾸한다.

“너는 손목 아프담시로 시방 멋하고 있냐. 사서 고생하지 말고 니 몸 니가 애껴라”

할머니 곁에서 엄마도 한마디 하신다.

, 엄마.” 대답하는 순간 옆에 있는 빨래비누가 눈에 들어온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상표가 희미하게 자국만 남아있다. 문득 빨래를 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의 하루는 빨래로 시작해서 빨래로 마치는 것 같았다빨랫방망이질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들리지 않는 날은 엄마가 몹시 아픈 날이었다.

엄마는 마루에 신문지를 펴놓고 나와 동생의 손톱을 깎아주셨다. 손톱을 깎아주던 엄마의 손톱은 언제나 짧고 깨끗했다. 언제 엄마의 손톱을 깎았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내가 교복을 벗을 즈음 우리집에 세탁기를 들여온 후에야 엄마가 손톱 깎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의 손톱이 늘 짧았던 이유를 어려서는 알지 못했다

자식을 아홉이나 둔 엄마의 손톱은 그저 닳기만 하는, 손끝에 달린 비누였다. 이제 손목이 아플 나이가 되어서야 자라지 않던 엄마의 손톱을 헤아리고 있다.

어쩌다 마음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의 무게에 짓눌릴 때가 있다. 그런 때 커튼을 걷어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빨래를 하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해지기도 했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해 때로 찌든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릴 때가 있다

가끔 속이 상해서 어찌 할 수 없을 때면 토끼의 간을 생각하곤 한다. 토끼처럼 마음대로 속을 빼고넣고 할 수 있는 재주가 내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흐르는 물에 훨훨 빨아 뽀얗게 말린 속을 다시 넣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오랜만에 손빨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내 안에도 시원한 물이 흐른다. 대야의 물을 마당에 쏟아 부었다. 쌓였던 먼지들과 거미줄들이 다 씻겨 내려간다

반가운 물세례에 잔디가 몸을 흔들어댄다. 마당도 마음도 개운하다. 널따란 대야에서 멱을 감고 나온 셔츠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건조대에 걸어 놓으니 파란 하늘을 향해 깃을 세운다. 하얀 제복의 청년들 같다. 저들이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에 마음마저 상쾌하다.

마당 뒤편에 나지막이 둘러진 돌담이 너럭바위 같다. 바람에 살살 흔들리며 고슬고슬 마르는 옷들은 토끼가 빼어둔 간인 듯하다. 아무래도 손빨래를 하는 동안 토끼가 다녀간 모양이다. 토끼를 좇는 두 귀가 쫑긋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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