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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20 04:29
[시애틀 수필-안문자] 뉴욕의 5박 6일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991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뉴욕의 56
 
지난 성탄절에 뉴욕의 아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흐뭇한 남편은 일찍이 보내준 항공 티켓을 드르륵 복사하여 나에게 안겨 준다. 즐거운 A4용지를 잘 보이는 곳에 부쳐놓고 오가며 본다. 볼 때마다 행복한 기다림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과연 뉴욕은 활기차고 현란했다. 도시 전체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였고 캐롤과 함께 밀려다니는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은 역동적인 생명력이 넘친다나는 마치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들은 구경하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을 묻는다. ‘그저 너희들과 마주앉아 쳐다만 보아도 더 이상 바랄게 없단다.’ 답은 이렇게 애틋하련만 그들이 엄마의 마음을 어찌 알랴. 무엇을 하든 우선순위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인 것을.

딸 내외와 사돈까지 합세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만찬은 아들이 차렸다. 요리 못하는 나에게 이 무슨 복인가. 사위의 요리솜씨는 이미 소문이 났고, 시애틀에 오면 엄마의 걱정을 지우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서는 아들의 솜씨도 보통은 넘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을까.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 곧 멋지게 잘 사는 것이라고 구약의 전도자도 말했다. 그런 멋진 삶이 인생이 누릴 몫이라 하지 않던가.(5:17)

훌쩍 자란 손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선물 포장 뜯기에 정신이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는 엄마와 아빠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산타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느 작가의 말대로 산타크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크로스가 되는 것이라고 한 말의 의미가 새롭다.

<세인트 토마스> 성공회 교회에서의 크리스마스 예배는 거룩하고도 아름다웠다. 그곳에는 요즘 교회마다 유행인 복음성가와 드럼의 분주함은 없다. 유명한 성가대의 영혼 깊은데서 흐르는 맑은 성가만으로도 은혜가 충만하다

주고받는 찬송의 흐름과 청중이 화답하는 기도 속에 우리의 소망을 담는다. 세계 도처에 전쟁과 슬픔이 가득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느끼며 그 뜻을 헤아린다.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 꿇어앉아 성체를 받아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예식도 신비로웠다

내 몸과 영혼이, 내 생각과 뜻이,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싶은 간절한 기도를 깊게 한다.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마술피리>(Magic Flute)!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모차르트의 노래들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과연 뉴욕 가수들의 열창은 나의 가슴을 감격으로 뛰게 했다. 성탄예배를 위해, 오페라 감상을 위해 길에까지 줄을 서서 들어가던 모습은 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서관의 하나인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줄 이은 여행객들의 숨죽인 질서와 빈틈없이 앉아 책과 컴퓨터 앞에 집중해있는 공부벌레들의 진중한 눈빛이 경이롭다

그렇다. 나는 세상에 빛을 나르는 교회와 지식을 넓히는 책이 가장 존귀한 선망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간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50년 후에라는 기사가 떠올랐다

평균 수명은 40%나 늘고, 동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외계의 생명체가 발견될지 모른단다.  그때는 100세의 노인이 60대처럼 될지 모른다나. 그 기사를 읽은 것도 몇 해가 지났으니 지금은 또 어떤 예측이 추가됐을까. 현대판인 바벨탑, 무섭다. 과연 우리의 아이들이, 그 다음, 그 다음 아이들이 주인이 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고 두렵다.

헤어질 시간이다. 결코 만만치 않을 세상에 살아갈 천진한 손자들이 안쓰러워 왈칵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꼬마들은 이른 세배를 한단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를 즉석으로 외무며 말과 절이 헷갈리던 녀석들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석별의 분위기를 웃음판으로 만들었으니 잘된 셈이다. 가슴 벅찬 만남이 있은 후 아린 헤어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겪어야하는 순리인 것을. 젖어오는 마음 깊은 곳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참된 여행은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내게 여행이란, 흩어졌던 가족들과의 사랑이 새롭게 이어지는 것과 함께 다른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자연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게 하신 섬세하고 오묘한 세상에서 나는 행복한 하나님의 작은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비행기는 두 날개를 휘저으며 항로를 따라 소리 없이 날아간다. 읽고 있던 책의 무게를 느끼며 눈이 감긴다, 이 거대한 문명의 이기는 깜깜한 하늘 길을 어찌 알고 가는 것일까. 기적 같은 신비에 몸을 맡기며 스르르 밀려오는 피곤함이 달콤한 잠으로 이끈다

그동안 시애틀엔 광풍과 많은 비가 내렸다지만 다정한 이슬비가 우리를 환영한다, 새해의 태양이 먼저 와 있는 제2의 고향, 돌아올 곳이 없다면 여행이라 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반가운 시애틀의 초록이 웰컴, 시애틀을 합창하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 프랑스의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187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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