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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03 11:02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봄의 자리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035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봄의 자리
 
파릇한 봄이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마당에 쌓여 있는 눈더미에 몸을 움츠리더니 이내 어린 풀들과 함께 무리 지어 올라온다. 작고 여린 봄이 푸른 입김을 호호 불며 자리를 넓혀 가기 시작한다.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겨울이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계절마다 서야 할 제 자리가 있다. 폭설로 세상을 호령하던 겨울도 이젠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내겐 유난히 길었던 겨울, 그래서 봄이 더 반갑고 고맙다. 겨울과 여름의 중간에 서서 서슴없이 양 손을 내미는 봄이 대견하다. 추위를 데우고 더위를 식혀 훈훈한 기운으로 세상을 감싸는 봄의 마음이 귀하고 귀하다

내 손을 펼쳐본다. 나는 이 두 손으로 무엇을 잡으며 살아왔는가. 뜨거운 것은 뜨거워서 멀리 했고, 차가운 것은 차가워서 손대기를 싫어했다. 늘 몸을 사리면서 누군가 알맞게 맞춰 놓은, 적당히 따뜻한 곳에만 머물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힘들고 난처한 일이라도 생기면 슬며시 손을 거둬들이곤 했다. 봄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봄의 자리에 서서, 내 손이 잡아야 할 것들을 곰곰이 헤아려 본다.

봄은 새로운 것을 본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는 따뜻한 불의 기운이 온다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 새롭게 본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싶다

한 해의 시작을 봄이라고 이름 한 선인들의 통찰력과 탁월한 언어 감각이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의 마음이 빚어낸 말들로 내 빈곤한 언어의 집을 채우고 싶다. 봄처럼 새로운 눈으로 하루를 바라볼 수 있다면 떠오르는 태양빛에 마음도 덩달아 환해지겠다. 해처럼 둥근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은 숨바꼭질 하는 아이들 같다. 모퉁이에 숨어 빠끔히 고개를 내밀다 가도 다가가면 금방 사라져버린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봄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앙상한 가지 끝 빨간 눈 속에 숨어 있는 봄을 찾았다. 얼마 있지 않아 개구쟁이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면 봄은 재채기를 하며 와르르 쏟아져 나오겠지. 나뭇가지 위에 작은 미소 살며시 얹어 놓는다.

봄에는 보이지 않는 눈이 뜨이고 들리지 않는 귀가 열리곤 한다. 새로운 봄의 자리에 서 있으면, 씨앗 속에 숨겨져 있는 작은 생명의 신비가 보인다. 꿋꿋하게 겨울을 지나온 나무의 밑동에서 힘차게 올라오는 물소리가 들린다

아직 남아 있는 흰 눈으로 마음을 씻어 봄의 자리를 넓혀야겠다. 지금 마당에 쌓인 잔설은 순백의 순수를 내 안에 담을 수 있도록 겨울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인지 모르겠다. 눈부시도록 하얀 눈의 눈물로 영혼의 옷 한 벌 짓고 싶다.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찾아온 봄이 참 기특하다. 차가운 맨발인 데도 흙 속의 알뿌리에게 제 몸의 온기를 나눠주고 있다. 누가 봄에게 제 자리를 일러주었을까. 알을 품은 어미닭처럼 노란 병아리 색의 수선화를 피우기 위해 봄은 동그란 뿌리들을 궁굴리고 있다. 무지갯빛 고운 튤립 뿌리들도 색색의 젖줄기를 찾느라 봄의 가슴을 헤치고 있다. 우주가 열리는 찬란한 순간을 기다리며 봄은 햇빛과 별빛을 부지런히 모으고 있다.

철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의 별자리가 바뀌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나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말 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았다

내가 선 자리가 언제나 세상의 중심이었고,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삶의 좌표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아서였다. 쉰여섯 번째 봄을 맞는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어린 아이처럼 자라지 못한 구석이 많다. 여전히 자신과 불화하며 세상을 향해 돌을 던져 대는 철부지의 모습, 봄이 보여준 나의 모습이다.

봄의 자리가 새롭다. 이제는 그만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겠다. 참된 것들을 바라보며 비뚤어진 좌표를 바로잡고 싶다. 정결한 영혼으로 빛의 향기 가득한 그 곳에 서고 싶다.

두 손에 봄이 가득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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