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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1 12:22
[시애틀 수필-김윤선] 삼베홑이불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013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삼베홑이불
 
 
까칠하게 날 선 삼베 올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다. 설핏 풀냄새도 난다. 고향집 앞바다의 갯내도 나는 듯하다. 어머니가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보따리를 풀어헤치자 어제 개어놓은 듯 삼베홑이불이 말간 얼굴을 드러낸다.

십 수 년이다. 서운함보다 그리움이 더 컸던 듯, 아니 무심한 주인에게 여봐라 며,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건강하다. 어머니의 손길이 오죽했을까마는 반가우면서도 미안하고 부끄럽다. 사실 친정집에 이삿짐을 맡겨놓은 이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시애틀의 여름 날씨가 한국의 그것과는 달리 삼베홑이불이 필요할 만큼의 기후가 아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머니가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지금도 보따리를 열어볼 생각조차 안했을 게다. 촉감도 그렇지만 흐늘거리는 중국산과는 판이하다. 더구나 내 것은 토종이다. 남해도산(産} 할머니제(製)이니까.

한여름, 빳빳하게 푸새한 까칠한 삼베홑이불을 덮어보라. 아이쿠! 걸음아 날 살려라, 라며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한더위의 뒷모습을 여충 없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뿐이랴, 살갗에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만들어 내는 공간들, 그 틈새에서 이는 바람. 그리고 느껴지던 할머니의 사랑. 삼베홑이불을 푸새하는 일은 내가 여름을 맞는 정례행사였다.

햇빛이 밝은 날을 골라 삼베홑이불을 푸새했다. 그런 날엔 하루를 일찌감치 시작해야 한다. 더위가 퍼지기 전에 밀가루 풀을 쑤어야 하니까 말이다. 풀을 쑤고 나면 한 김을 빼고 나서 작년에 풀기를 빼놓았던 삼베 홑이불을 담그고 골고루 치댄다. 

손놀림의 횟수가 푸새의 밀도를 좌우하니 이때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웬만큼 풀을 먹였다 싶으면 햇빛에 넌다. 그런데 한여름의 햇빛은 강도가 강해서 자칫 한순간에 마를 수 있으니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고 꼭 한 번은 뒤집어 줘야한다. 그러다가 풀기가 대충 말랐다 싶으면 걷어 와서 수건에 잘 싸서 발로 밟는다. 

할머니가 하시고 어머니가 배우셨던, 그래서 내가 또다시 어깨너머로 배운 대로 앞뒤를 뒤집으며 고루고루 밟고 나면, 삼베는 마치 다림질을 한 듯 구김살이 펴지고 올은 낱낱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나는 삶의 자태, 가진 자들의 갑질 행위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인간의 삶을 부끄럽게 한다.

풀기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던 삼베의 오만함이 이때 쯤 고개를 숙이고 나면 모른 체 그것을 다시 햇빛에 널어 바짝 말린다. 온종일 햇빛에 제 몸을 말리는 동안 쟁인 바람이 밤사이 올마다 마실을 돌며 속닥거린다

그런 삼베홑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면 나는 밤 내내 덤벙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어느 제왕인들 이보다 더 시원한 여름밤을 지낼까. 더위가 삼베 올을 빠져나가는 소리에서 나는 할머니의 베틀 소리를 듣는다. 할머니의 내음을 맡는다.

할머닌 동네에서 가장 길쌈을 잘하셨다. 척박한 섬마을에서 아드님을 뭍으로 유학시켰으니 그 빈곤함이 오죽했을까. 

촘촘한 바디살은 당신이 겪어야 할 삶의 질곡이었으리라. 게다가 한 번 뭍으로 나간 아드님은 영원히 대처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이후 베틀엔 그리움 하나를 더 얹어야 했다. 

훗날 내가 받은 첫 월급으로 지어드린 한복을 동네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하셨다는 할머니. 손녀가 노픈 핵고 선상님(고등학교 선생님), 이라고 자랑하셨다지만 정작 그것은 당신의 회한을 달래는 핑계였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길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입으로 삼 줄기의 겉껍질을 벗긴 후 허벅지에서 그것을 가늘게 나누었고 다시 무릎에서 손으로 비벼가며 한 올로 이어나갔다 그 때문에 당신의 허벅지는 가뭄에 탄 논바닥처럼 실낱같은 핏줄이 섰는데 무릎은 손바닥과의 마찰로 되레 반질반질했다. 

삼의 껍질을 발라내느라 늘 입을 오물거렸고, 손마디는 굵고 억셌다. 당신께서 모처럼 아드님 집에 다니러 오실 때도 길쌈은 언제나 짐 보퉁이 속에 끼어 있다가 슬그머니 재봉틀 다리에 매어져 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보풀이 비눗방울마냥 방 구석구석을 떠다녔는데 그건 할머니가 계시다는 전갈이었다.

내 삼베홑이불은 할머니가 따로 지어주신 것이다. 자식들 몫을 끝내고 고스란히 첫 손녀에게로 이어진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아드님에게 못다 한 사랑의 증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학비에 쫓겨 정작 아드님에게는 성한 이불 한 채 해주지 못한 회한을 손녀에게 베푸신 것이리라. 나는 그것을 할머니와 나만의 교감으로 느낄 수 있다.

햇빛 밝은 날, 열 시간의 비행으로 지친 삼베홑이불을 마당에 널었다. 산들산들 바람이 좋다. 낯선 물건이라며 입소문을 물고 온 동네 바람들이 그것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올 사이사이로 넘나든다. 한국 이야기, 미국 이야기. 아니나 다를까, 벌써 수다 떠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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