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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07 11:02
[시애틀 수필-안문자] 들국화에 핀 선생님의 미소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6,070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들국화에 핀 선생님의 미소

 
보라색 들국화가 애잔하다. 작은 송이마다 눈물방울처럼 이슬까지 담고 있어 마치 김순갑 선생님의 부고(訃告)소식을 슬퍼하는 것 같다. 김 선생님이 꺾어 주셨던 한 아름의 보라색 들국화도 고개 숙인 듯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 여성단체에 취직이 되었다. 내 책상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김 선생님은 중년의 자그마한 키에 약간 네모진 얼굴, 인고가 배인 인상을 애써 지우듯 따뜻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나는 그분을 의지하며 따랐다. 까닭에 우리는 나이 차이를 잊고 금세 친해졌다.

선생님은 결혼 6년 만에 아이 넷을 낳고 이혼을 하셨단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고달팠으련만 내색 않고 늘 웃으시니 선생님의 아픔을 읽을 수 없었다

남편은 산부인과 의사로 배우같이 멋졌다고 했다. E대학 가정과에 다니던 재주 많고 똑똑한 처녀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한 눈에 반해 졸업을 앞두고 덜컥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멋스럽고 준수한 용모 때문이었을까

어느 카페의 화려한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지 아마. 지금은 이도 저도 다 버리고 스위스란 나라로 가서 혼자 살고 있는 괴짜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때만 해도 스위스란 나라가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알았지 한국 사람이 그곳에 산다는 이야기는 생소했다.

내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200여 명의 여학생들과 광나루 신학교에서 컨퍼런스를 개최했는데 김 선생님이 몇 접의 오이지를 맛있게 담가 주셨다. 숨숨하면서도 오독거리는 고소한 오이지는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학생들이 즐겨 먹었다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소리 나는 선생님의 오이지는 어느 행사에서나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지금 그 맛을 떠올리고 있자니 군침이 고인다. 또 하나, 내가 결혼할 때 꽃장식과 함께 부케를 만들어 안겨주며 안문자 선생, 예쁘게 살며 행복하세요.’ 속삭이며 눈물을 글썽이던 미소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선생님의 얼굴에 평화가 사라졌다. ‘이봐, 안 선생,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지?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나와의 싸움이야.’ 남편을 잊고 잘 견디다 가도 한순간에 배반하고 돌아선 그가 떠오르면 미움을 통제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힘든 일이 있을 적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휩싸인단다. 아이를 넷이나 남겨두고 사라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어 매일 기도하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려고 노력하건만.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쓸쓸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편을 만났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돌았다. 직원들이 아우성치며 선생님 앞에 모여들었다

빙그레 웃음 짓던 그분, ‘독일에 있는 딸의 주선으로 그가 살고 있던 산골짜기의 통나무집에 갔었어. 마음의 동요는 없었고 그저 담담한 게 뭐, 그냥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어. 사냥이 취미라나. 사냥총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더군.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느라고 고생했을 터인데고맙구려그 한마디뿐이었어그래서 위로를 받았다고 해야 할지. 그게 끝이야.’ 

우리들은 에이~,’ 아쉬운 소리를 내며 김이 샜다. 다시 뭐 어떻게 안되나? 하던 기대가 싱겁게 됐기 때문이다. 남편을 이미 용서하고 만났기에 미움은 없었고 불쌍하기만 했다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셨다. 호기심에 찼던 젊은이들은 고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몇 년 후, 외로웠던 그 남자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왔다고 들었다.

우리는 이민 후, 30년이 되도록 성탄카드를 거른 적이 없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하고 냉정했다. 어느 해, 선생님의 카드는 나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관절염 때문인지 여기저기 병이 생겨 더 이상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다고 간신히 쓴 것 같은 필체의 카드가 왔다. -안문자와 즐겁게 나누던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내가 배반하게 되었구려. 답장이 없으면 정신이 없거나 하늘나라로 갔다고 생각해요.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어요.- , 다정한 사연으로 가득 찬 선생님의 카드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삶의 아픔을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용서와 감사로 충만한 나날을 보내셨다. 눈물로 키운 네 자녀의 효도 속에서 행복한 노년의 삶을 누리셨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비바람 속에서도 제 몫을 다하는 들국화처럼 살다 가셨다.

나는 지금, 김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들국화 사이로 환히 웃고 계시던 선생님이 그리워 숱한 추억을 담은 카드를 하나씩 열어본다. 하얀 꽃다발을 안겨주며 안문자 선생, 예쁘게 살며 행복하세요.’ 시애틀의 보라색 들국화 속에서도 그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도 꽃들의 눈물을 보며 화답한다.

김순갑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이제는 보라색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었을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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