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 2024-05-02 (목)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21년 1월 시애틀N 사이트를 개편하였습니다. 열람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2021년 이전 자료들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작성일 : 18-09-16 01:34
[시애틀 수필- 김윤선] 레이니어 산의 야생화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664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레이니어 산의 야생화


절정기는 지나 보였다. 그래도 여름 동안의 레이니어 산은 야생화까지 더해 주차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어렵사리 자리 하나를 찾았다.

트레일 코스는 내치스 픽 루프(naches peak loop)이다. 길이 완만해서인지 가족나들이가 많다. 어차피 한 바퀴를 도는 길이니 방향을 어느 쪽으로 정하든 상관없으리라. 8월의 셋째 토요일, 한더위가 설핏 자리를 비켜 앉은 듯 햇볕이 그리 뜨겁지 않았다.

주차한 차량에 비해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리를 지어 올라가는 한국의 등산길을 상상하는 내겐 그것이 늘 낯설다. 트레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땀을 줄줄 흘리며 가쁜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걸어도 시원찮은 판에 다 닦아 놓은 길을 터벅터벅 걷는 건 더 생리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깊은 산에서는 야생동물들과 맞닥뜨리기 일쑤이거나, 십중팔구 길을 잃을 것이니 이는 등산객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책일 것이라며 마음을 달랜다.

저만치 예쁜 보라색 꽃들이 눈에 띈다. 갈퀴나물이다. 종 모양의 꽃에서 풍경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따금 엉겅퀴도 보인다. 어쩌다 한두 송이 길가에서 만날 땐 그저 하릴없는 잡초로 보이더니 이곳에서 만나니 유별나다. 저도 제 자리에 앉은 듯 편한 얼굴이다

속이 찬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겉모습만 보고 허투루 대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서 공연히 무안하다.

쑥부쟁이도 눈에 띈다. 귀엽고 앙증맞다. 저기, 이름 모르는 흰색 꽃도 있다. 꽃송이가 더벅머리처럼 헝클어진 모습이 왠지 아련하다. 쭉 뻗은 큰 키로 군데군데 자리한 게 꼭 조문을 받는 상복 입은 상주들 같다. 설핏 지난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내 설움을 잠시 그들에게 얹어 본다.

발자국마다 흙먼지가 폴폴 날린다. 이 메마른 곳에서 수없이 꽃을 피운 저들의 생명력이 놀랍다. 특별히 눈을 끄는 매력은 없어도 수더분한 모양과 색상들이 마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것 같다

예쁘지 않아도 돼, 우리 다 함께 나눠 갖자.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니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꼭 나비들의 군무 같다. 저들은 그렇게 나비가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가 하는 모양이다.

엇비슷한 키와 수더분한 모양새가 저들을 이렇게 모여 살게 한 것일까. 별의 별 종류의 야생화가 다 있다. 이름을 다 불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게다가 땅을 나눠 갖는 미덕은 또 어떻고. 자세히 보니 이미 지는 꽃도 있지만 아직 봉오리도 있다

같은 날짜에 태어났어도 성장발육이 늦고 빠른 아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이민왔어도 빨리 적응하는 사람과 늦게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꽃도 다양하게 피고 진다.

“인증샷 해야지.

남편의 우스갯소리에 그들 속에 살짝 비집고 들어가 포즈를 취했다.

“아얏!

웬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 아차, 그곳은 내가 설 자리가 아니었다. 돌아보니 그들은 제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 채 조화롭게 피어 있었다. 자기만의 색상과 모양과 결을 지닌 채 어느 꽃도 어떤 열등감도, 어떤 우월감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비교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가를 탐구하느라 열심이었다.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느라 교만을 떨지도 않았다. 너는 네 아름다운 색상을, 나는 내 좋은 향기를. 게다가 제 뿌리만큼만 소유한 땅의 크기는 또 어떻고. 한 송이라도 더 자라게 하기 위한 저들의 양보심이 눈에 보였다

자신을 알고 모두에게 녹아 들려는 낮은 자세도 보았다. 불현듯 좀 더 잘나기를, 좀 더 돈이 많기를 바라는 내 이기심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저 꽃씨들은 애초에 어느 바람에 실려서 여기까지 왔을까. 혹 태평양 너머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오지 않았니? 그래, 어차피 이곳은 이민자의 나라 아니던가. 이 나라에서 우뚝 선 이 치고 조상이 이민자 아닌 이 있을까. 케네디가의 영광도, 워런 버핏의 부富도 이처럼 고만고만한 삶에서 비롯됐을 터, 알고 보면 야생화 밭이야 말로 미국의 상징이리라.

대학생쯤으로 돼 보이는 젊은 여인이 제 키만 한 배낭을 메고 혼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걷는 걸음이 남자 못지않다. 야생초 같은 이민자의 삶을 살았을 조상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레이니어 산의 가슴이 참 따뜻하다.


 
 

Total 696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606 [시애틀 수필-공순해] 헤어롤에 물든 단풍 시애틀N 2018-10-21 3307
605 [시애틀 수필-안문자] 들국화에 핀 선생님의 … 시애틀N 2018-10-07 6070
604 [시애틀 수필- 김윤선] 레이니어 산의 야생화 시애틀N 2018-09-16 5666
603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과’이고 싶다 시애틀N 2018-09-09 3576
602 [시애틀 수필-이한칠] 시애틀, 한여름의 단상 시애틀N 2018-08-26 4139
601 [시애틀 수필- 김홍준] 우뭇가사리의 추억 시애틀N 2018-08-19 3815
600 [시애틀 수필-정동순] 딱 10분 시애틀N 2018-08-12 3146
599 [시애틀 수필-장원숙] 사랑 시애틀N 2018-08-05 3657
598 [시애틀 수필-공순해] 구글 맵 시애틀N 2018-07-29 3842
597 [시애틀 수필-안문자] 클래식은 삶의 기쁨 시애틀N 2018-07-15 3593
596 [시애틀 수필-김윤선] 삼베홑이불 시애틀N 2018-07-01 3013
595 [서북미 좋은 시-이성은] 가을로 물들다 시애틀N 2018-10-14 3626
594 [서북미 좋은 시-박수경] 사랑으로 시애틀N 2018-09-02 3883
593 [서북미 좋은 시-임용근] 님의 넋 시애틀N 2018-07-05 3154
592 [해설과 함께 하는 서북미 좋은시- 조영철] 벌… 시애틀N 2018-12-23 2195
 1  2  3  4  5  6  7  8  9  10    



  About US I 사용자 이용 약관 I 개인 정보 보호 정책 I 광고 및 제휴 문의 I Contact Us

시애틀N

16825 48th Ave W #215 Lynnwood, WA 98037
TEL : 425-582-9795
Website : www.seattlen.com | E-mail : info@seattlen.com

COPYRIGHT © www.seattlen.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