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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21 13:23
[시애틀 수필-공순해] 헤어롤에 물든 단풍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307  

공순해 회장(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헤어롤에 물든 단풍
 
 
그녀는 우리를 늘 슬금하게 웃긴다.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그녀. 비록 늦긴 하나 그러나 그녀는 늘 진지한 얼굴로 나타난다. 하면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진지함에 웃게 되는 게 아니라 앞머리에 올라앉아 있는 물건 때문이다

주인의 뜻과는 달리 똘똘한 아이처럼 얼굴을 쏙 내밀고 있는 헤어롤 한 개. 주부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매무새를 다듬고 머리 형을 만들려 헤어롤을 앉힌 뒤, 서둘러 집에서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전력 달려왔을 그 모든 과정이 그 물체 하나로 모두 상상이 돼 그만 웃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단 이렇게 웃고 시작하면 모임이 느긋한 모양새가 된다. 의도했거나 아니거나 그건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대화법이다.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친밀감을 조성해 일을 부드럽게 풀어나가는 애교스러운 방법이랄까.

하긴 이보다 더욱 통절(?)하게 웃음을 유발시킨 예도 있다. 한국 정치사 중 초유의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된 2017 3 10일 오전 차에서 내리는 정장 차림의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의 뒷머리에 얹혀 있던 분홍색 물건. 그건 헤어롤 두 개였다. 귀추를 주목하느라 쓴 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TV 화면을 지켜보던 전 세계 시청자에게 그보다 더 강력한 긴장 완화제는 없었으리라. 헤어롤 두 개를 뒤통수에 말고 앉아 판결문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여판사라니.

헌재 내부에선 시간이 지나며 신선한 웃음을 안겼던 그 헤어롤들을 기록물로 박물관에 영구보관해야 한단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한술 더 떠 AP통신은 핑크색 헤어롤 두 개를 얹은 그 사진과 함께, 자기 일에 헌신하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 사건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되짚어 보게 했기에 이를 치소거리로 삼은 사람은 없었다고 보도했다.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부장이 헤어롤을 달고 있는데 차마 그 얘길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는 얘기,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는데 상대방 아줌마가 헤어롤을 말고 있어서 웃겼다는 얘기

나아가 아이 놀이방 보내느라 서두르다 출근해서 보니 눈썹을 한쪽만 그렸더라는 얘기, 얼굴 화장은 다 했으나 입술만 바르지 않고 출근했다는 SNS의 일상적인 얘기들은 우리를 웃게 한다. 이런 걸 요즘 젊은이들은 웃고 싶지만 슬픈 현상, 즉 웃픈 현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에서 더 각광을 받는 쪽은 이다. 시간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우리를 웃게 하는 것들>로 진화(?) 중이다. 삶의 에스컬레이터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현실은 더욱 그렇게 되어간다. 좋아요, 싫어요만 누르고 사는 세상에 슬퍼요에 대한 버튼은 아예 없다.

심지어 의전과 절차를 우선으로 삼는 정부 뉴스에서도 독자는 웃을 수 있는 보도를 더 선호한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골치 아픈 법안이었던 감당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 법새 환자 권리장전을 발표할 때 오바마 대통령 코 위에 앉아 있던 파리는 시청자들의 긴장을 와해시켰다.

백악관에 파리가 많은 건지도 모르겠는데 백악관 발표 자리엔 종종 파리가 등장해 세인을 폭소하게 한다.

오바마가 국민을 웃게 한 일은 또 있다. 미 국립 흑인 역사 문화박물관 개관식에서였다. 이날 개관식에 참석했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한 흑인 가족과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다가 여의치 않자 앞에 서 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등을 툭 치며 휴대폰을 건넸다

참석자들과 열심히 악수하고 있던 그는 뒤로 돌아선 뒤 흔쾌히 휴대폰을 받아 들고 부시 전 대통령과 흑인 가족들이 함께하는 사진을 찍어줬다. 부시의 전속 사진사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던 그 순간의 그는 시드니 포이티어 만큼 멋져 보였다.

이런 파격들이 우리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여 각박한 현실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래서 요즘엔 결혼 상대의 조건 일 순위가 웃음 코드가 같은 사람이란다

줄잡아 한 세기 전 각박한 삶을 탈출하고 싶었던 이상은<날개>의 화자를 통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하며 절규했다. 이런 식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웃자, 웃자, 한번만 더 웃자꾸나, 가 아닐까. 소박한 도약의 꿈. 진정한 웃음은 어디서 올까.

슬쩍 밖을 내다보니 앞마당의 나무도 헤어롤을 말고 섰다. 내가 아는 그녀의 앞머리에 올라앉은 롤 한 개만큼만 단풍이 물들어 있다. 이번도 역시 슬며시 웃지 않을 수 없다. 나무처럼 헤어롤을 말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그러나 내겐 그만큼의 머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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