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로존 리세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균형예산 추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 AFP=News1>
유럽 1위 경제대국 독일의 경기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전역에 리세션(경기후퇴) 위협이 확산되고 있지만 독일 정부는 공공지출을 늘여야 한다는 요구에 귀를 닫은 채 긴축을 지속하고 내년에 균형예산을 달성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독일 정부의 고집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슈바르츠 눌(schwarze Null)'에서 비롯됐다. 독일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즐겨 쓰는 이 표현은 균형예산을 뜻한다. 메르켈 총리는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내년도에 균형예산을 꾸리겠다고 공언했으며, 재정건전성에 대한 강조는 3선 연임에 성공한 메르켈 총리가 누리고 있는 높은 인기의 비결 중 하나이다.
긴축에 집착하는 독일의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2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나치가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독일은 인플레이션에 무척 민감하고 긴축을 중시해왔다. 이는 검소한 독일 국민성과도 맞떨어진다. 최근 몇년 동안에는 유럽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지원 대신에 이웃 국가들에 긴축과 재정적자 축소를 강요해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지난 14일 자신이 속한 기독민주당(CDU) 내 비공개 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독일의 입장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벗어나면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는것이 된다"며 "유럽 내에서 우리의 공언이 무게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자그마르 가브리엘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기자회견에서도 "독일의 부채가 증가한다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의 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며 "독일 정부는 최근 조정한 2014년 1.2%, 2015년 1.3% 성장 목표에서도 균형예산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며 총리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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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분기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추이(전기비, %)와 주요국 청년실업률(%) © 유로스타트=News1 |
기민당 예산위원회 노르베르트 바틀레 의원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또 다시 우리에게 투자를 더 하라는 요구가 있다"며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목표를 포기했을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함의를 완전히 무시한 온전히 경제 분석일 뿐이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발언은 유로존이 일본처럼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된 상황에서 유럽의 성장을 견인해온 독일의 최근 경기가 급격하게 둔화되면서 독일이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사용해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긴축을 완화해야 한다는 압박이 가중되자 나온 것이다(기획 上 참조).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유럽중앙은행(ECB),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 등은 유로존이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9일 연차총회에서 유로존에서 "심각한 (리세션) 위기가 있다"며 독일이 재정흑자를 성장촉진을 위해 써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전했다.
투자에 대한 요구는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독일경제연구소(DIW)는 독일은 연간 800억유로 규모의 투자갭(간격)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IMF에 따르면 1990년대 초 독일 GDP 대비 공공 및 민간 투자 비중은 23%였지만 현재는 17% 정도로 떨어졌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0%에 못 미치며 전세계 141위이다.
이탈리아 경제지 일 솔레 24 오레는 지난 10일 "2012년 말, 쾰른 지자체는 고속도로에 있는 다리를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해서 이 다리를 강제로 폐쇄시켰다. 고속도로 연결망을 늘 자랑했던 독일은 당시에 크게 당황했다"며 "독일의 인프라, 무엇보다 도로망은 부적절한 유지보수 때문에 최소 20년 이상 노후화됐다"고 전했다. 이어 "유지보수 조치는 '균형예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엉망이 됐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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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GDP 대비 투자 비중(%) 연도별 추이와 각국별 2013년 GDP 대비 투자 비중 비교 © IMF=News1 |
하지만 현 경기 진단에 대해서는 온도차가 크다. 독일 정부는 현재의 경기 둔화는 글로벌 성장 둔화, 우크라이나 사태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란 견해를 유지하며 외부 전문가들의 생각과는 차이를 보인다.
증권사 하그리브스 램스다운의 선임 이코노미스트 벤 브레텔은 가디언에 "유로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재까지는 변방국에만 해당됐고 핵심국은 상대적으로 좋은 흐름을 보였다. 하지만 최근 몇달 동안에는 핵심국이 난관에 봉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리처드 그리브슨은 "유로존에서 독일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앞으로 수분기 동안 유로존에서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독일의 지표 부진이 사상 최저인 인플레이션 전망과 맞물려 유럽중앙은행(ECB)로 하여금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QE)에 나서도록 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ECB의 이 같은 정책은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와 독일 정치권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최근의 심상찮은 경기 둔화 신호에 독일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새어 나오고 있다.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 중진인 랄프 스테그너는 wsj에 균형 예산이 교육과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추진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특히 내년까지 극심한 불황이 이어지면 독일도 기존 입장만 고수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독일의 한 정부 관리는 로이터에 "균형예산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인 허리띠 졸라매기가 리세션을 심화시킨다면, 기존 방침은 재고되고 지출은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메르켈 총리의 측근인 또 다른 관리도 "독일 경제가 심각하게 약화되면 그것이 판을 바꿔놓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