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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6 17:13
[신앙과 생활] 목적있는 죽음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760  

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목적 있는 죽음


불교의 석가님, 유교의 공자님, 그리고 기독교의 예수님이 각각 맞으신 죽음을 보면 예수님은 다른 두 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석가님은 80세가 되도록 장수하셨지만 좀 더 사실 수도 있었는데 그 당시 유행하던 이질 비슷한 질병 때문에 돌아가셨고, 공자님도 그 옛날에 70이 넘도록 사셨으니까 천수를 다 누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만큼 사시고 자연사를 하신 것도 아니고, 어떤 질병 때문에 더 사시고 싶은 뜻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일부러 자초하셨고 그 죽음을 향해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즉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그 목적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죽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기 위해 사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죽음의 목적이 바로 인류의 죄를 속량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죽음을 앞에 두고 사셨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4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심혈을 쏟으시며 들려주신 유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남기시고 싶은 수 많은 유언들을 3년이라고 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한 마디라도 더 남기시기 위해 온갖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박해를 받으시면서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정처 없이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난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금요일에 고난 당하셨는데 바로 전날 목요일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인류구원이라는 대 명제(命題) 앞에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로 결단하시던 그날, 그가 걸어가시는 그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어머니가 알았겠습니까, 동생들이 깨달았겠습니까,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뜻은, 그들이 이해하고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높고 넓고 깊었기에 홀로 고뇌하시고 홀로 기도하시고 홀로 외롭게 죽음의 때를 결단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육신에 가해진 고통이었다면 그때 피땀을 흘리시면서 까지 기도하시며 겪으신 그 고독한 고통의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영혼에 가해진 십자가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당시 로마시대에는 잔혹한 사형 방법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십자가 처형은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시시각각 닥쳐오는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다 겪으면서 죽어가는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자신의 소유라고 할만한 것은 가져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태어나실 때도 남의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셨고,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예배당은 물론 강대상도 없는 산이나 들판이나 바닷가 배위에서 설교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신 나귀도 남의 것을 빌려 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시신이 안치된 곳도 아리마대 요셉에게서 빌린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만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은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소유하셨던 확실한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명패까지 붙여 있지 않았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의 묘실에 모셔 놓았지만 장례식에서 흔히 보는 꽃 한 송이도 없이, 슬픈 가락의 조가 한 곡도 없이, 그 누군가의 단 한 마디 추모사도 없이, 애도에 젖은 장례의 행렬도 없이, 그리고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제자들 중 단 한 명의 흐느낌도 없이 골고다의 돌바위 사이에서 외롭게 숨져 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사실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다만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든가 부활의 영광 뒤로 십자가 고통이 가리워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후의 부활은 이미 육신을 떠난 또 다른 차원의 사건이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시던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이었고 최상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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