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대신
겪는 고통과 죽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들이 겪는 정신적ㆍ육신적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특히
부모ㆍ자녀ㆍ배우자ㆍ형제 자매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더욱 일체감을 가지고 함께 괴로워합니다.
오래
전 필자가 읽은 어느 중학생이 쓴 수기의 내용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남동생이 책상에 앉아 종이에 무엇인가 열심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인 형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생의 등 뒤로 살며시 가서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동생은 그 전날 소풍 가서 놀던 장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희희낙락하며 뛰어 노는데, 한 어린이만은 나무에 기댄 채 외롭게 홀로 서있었습니다.
다리 하나가 유난히도 가늘고 짧은 아이였습니다. 그는 바로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그 동생 자신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형은 말없이 조용이 돌아서서 거실로 나왔습니다.
소풍날 그렇게도 즐겁게 달음질치며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된 채 외롭게 나무 밑에 서있었을 동생을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의 튼튼한 두 다리를 붙들고 동생의 그 허약한 다리와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다리를 원망하면서 한없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구의 동생을 어떻게 도울 길이 없어 그저 그의 아픔에 동참하며 아픔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생과 함께 겪는 아픔입니다.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의 저자 이돈형씨는 6ㆍ25 당시 고등학교 2학년때 학도병으로 입대 하였다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인민군에 투입되었는데 이번에는 한국군에게 또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2년 반 만에, 아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부모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그 동안 자식을 위해 바친 몸과 마음의 정성과 고행을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맛 좋은
음식이라고는 만들거나 사먹은 적이 없이 겨우 생명만 부지할 정도의 식행활을 해왔고 영하 수십도의 추운 눈과 바람을 맞으며 험산 계곡을 누비고 있을
자식을 생각하면서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아랫목 자리를 비워둔 채 차디찬 윗목에서 잠을 잤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창문에 구멍을 뚫어 찬바람이 들어오게 하면서, 전선에서 고생하는 아들의 고통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아무리 지극한 정성과 고행을 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전선에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0.1도의
온기도 더해 줄 수가 없고 앞에서 말한 중학생 형이 자신의 건강한 다리를 붙들고 아무리 울어도 동생의 약한 다리에 힘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우리와 ‘함께’ 겪으시는 게 아니라
‘대신’ 져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대속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표현이 맞기는 하지만, 막연히 ‘죄’라고 하기보다는 죄의 결과로 받게 될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셨다는 표현이 더 구체적이고 직감적인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로 받아야 할 고통이 어떠한 지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속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앞에 두고 피땀을 흘리시며 드리신 고뇌에 찬 기도. 체포되시어 대제사장과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 다니시며 당하신 모욕과 수치. 갈고리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탈진된 몸에 십자가까지
지워져 기진맥진한 채 쓰러지시던 그 고통. 큰 대못을 양손과 발에 박을 때마다 바르르 떨던 손가락들의
경련과 비명소리.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 가시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핏물에 젖은 두 눈을 감으시며 고개를 떨구시던 마지막 운명(殞命)….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끝내 침묵하신채 가슴에 품고 가셨을 3마디, ‘너를
위하여’, ‘너 대신, 너 대신…’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을 우리에게서 고스란히 거두어 주시려고 ‘대신’ 지신
그 고난. 그 망극하신 대속의 은혜를 전하는 감격스러운 소식. 그것이
복음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