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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22 13:58
[시애틀 수필-김윤선] 흉 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793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고문)

 
흉 터
 
저만치 몇 그루의 나무들이 보였다. 멀리서 바라봐도 연기에 그을어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연신 뜨거운 김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뜨거움 때문에 바위마저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곳, 이름 그대로 옐로스톤이다. 혹 푸른빛을 띠는 곳도 있었지만 별로 다르지 않았다.

옐로스톤이 불가사의한 관광지라는 명성을 지닌 곳이라면 뭔가 얘기를 담을 만도 한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이름이라니, 참 실용적인 사고다. 연신 쏟아내는 열기에 세상이 어떻게 제 모습을 온전히 지닐까마는 지표면 색깔마저 바꾸다니, 그 혹독함에 몸이 오싹했다

그런데 그런 혼란스러움도 세월 탓인지 퐁퐁 솟아오르는 한가한 물의 기포와 노여움이 빠진 수증기로 변해서 나는 마치 노천온천에라도 와있는 듯했다.

크고 작은 웅덩이에서 벌어지는 물과 수증기의 유희에만 얼이 빠져서 나는 이내 나무들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들은 나와의 눈 맞춤을 기다린 듯 돌아서려는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멀찌감치 삐죽거리며 서성이고 있는 게 뜨거움을 피해 달아났다가 영원히 빼앗겨버린 땅에 대한 억울함이라도 호소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내 눈에 먼저 띈 건 나무둥치의 아랫도리에 그어져 있는, 길어야 한 뼘이나 될까 싶은 흰색의 선이었다.

처음엔 벌목할 나무의 표시인가 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간헐천 지대에 있는 나무가 아닌가. 당시 분명 뜨거운 물이 범람했을 지역이었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뭔가 집히는 게 있었다. 저들의 모습이 저들만의 삶의 흔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불현듯 솟구쳐 오른 뜨거운 물줄기로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을 세상 모습에 짐작이 갔다. 날개 있는 것들이야 저마다 날아올라 위험을 피했을 테고, 네 발 달린 짐승들 또한 오죽했을까

그런데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은 어찌 됐을까. 한 치라도 더 깊이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튼실한 나무로 자랄 것이라며 삶의 책임을 다한 나무들 말이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밀어닥친 뜨거운 물벼락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도미노처럼 쓰러진 나무들. 그런데 저들은 어쩌자고 죽어서도 저리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저들이야말로 이곳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크고 작은 동물은 물론이고 산새들을 품은 저들의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돌연한 침입자라니.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라 해도 그들의 자취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리라

기록을 남기는 게 인간만일까. 흰색 선은 그런 저들의 소망을 지키기 위한 증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수에 녹아 있던 이산화규소가 죽은 나무를 뚫고 들어가서 밑동을 단단하게 만들어 저들의 몸을 꼿꼿이 세우게 한 게 말이다

그건 적과의 동침이었다. 그리하여 이 땅만은 절대 내줄 수 없다는 결연한 표시였으며, 삶의 역사서였다. 그런데 훗날, 이곳 사람들은 죽은 나무의 하얗게 규화된 부분이 발목 양말의 끝동 부분을 닮았다 하여 ‘베이비 삭스(Baby Socks Trees)’ 라고 이름 지었단다.

얼굴에 검붉은 흉터를 가진 선생님이 있었다. 누가 봐도 화상의 흉터였다. 선생님이 원체 미남이어서 그랬지 안 그랬으면 정말 마주 대하기 민망했을 게다. 집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집안에 있던 아이를 구하려다 다친 상처의 흉터라고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난 후,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경건하기까지 했는데 그게 선생님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아니면 존경의 뜻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아비만이 할 수 있는 훈장이었던 선생님의 흉터는 어버이의 자식 사랑을 보여준 체험의 장 같은 것이었다.

마침 눈썹에 가려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내게도 흉터가 있다. 걸음마도 못하던 시절, 평상에서 놀다가 떨어졌는데 마침 길가 도랑으로 떨어져 몇 바늘 꿰맸단다. 그 때문에 엄마는 늘 내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흉터가 어찌 외모에서만일까. 사실 외모의 흉터야 성형수술이라도 하면 없어지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 속을 보지 못하니 스스로 드러내서 치유하지 않으면 더 큰 흉터로 남는다. 그러고 보면 다양해지는 범죄 유형과 늘어나는 범죄자들 또한 마음속에 박힌 흉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억눌리고 무시당하면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생긴 상처가 흉터로 남은 까닭이리라. 한 세상 잘 살은 사람이란 결국 흉터조차 보듬어 준 삶일 터, 베이비 삭스 나무처럼 흉터를 훈장으로 바꾼 삶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베이비 삭스 나무 위로 선생님의 얼굴 흉터가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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